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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속의 심리학

심리학자 [ 알프레드 아들러 ] Alfred Adler]

by sjjhcy 2022. 7. 17.

 알프레드 아들러 [ Alfred Adler , 1870 ~ 1937 ]

 

 

아들러

 

오늘 소개해 드릴 심리학자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계 의사이며 개인 심리학의 창시자 셨던 오스트리아 출신 이셨습니다.

 

알프레트 아들러는 비엔나 근교 펜칭(Penzing)에서 유대인 중산층 상인인 아버지 레오폴트 아들러(Leopold Adler)와 어머니 파울린(Pauline)에게서 4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구루병 때문에 4세가 되어서야 걸음마를 시작하였고, 폐렴 때문에 목숨이 위험한 상황도 겪었다. 

 

게다가 아들러는 3세 때 자기 침대 옆에서 동생이 죽는 것을 경험하였는데, 자신의 병약함과 동생의 죽음은 아들러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의학에 관심을 갖는 원인이 되었다. 

아들러는 형에 대해서는 열등감에서 비롯된 경쟁심이 심했고, 동생이 생겼을 때는 어머니의 사랑을 동생에게 빼앗겨 버렸다. 그런 이유로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이 같은 경험에 따라 프로이트(Freud)의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학창 시절 아들러는 매우 평범한 학생으로, 수학시험에 낙제하여 재수강을 받기도 했고 선생님에게 상급 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구두 제화공 기술을 배우라는 권유도 받았다. 

 

그때 선생님과 상담을 했던 아들러의 아버지는 선생님의 의견과는 달리 아들러가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어 결국 최우수 학생으로 졸업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후 1888년 명문 비엔나 대학교에 입학해서 의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대학 재학 시절, 정치, 경제, 사회학 등을 두루 섭렵하였고, 사회문제와 사회적 신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 마르크스의 저서를 특히 많이 읽었다.

 

 

1895년에 비엔나 대학교에서 의학박사학위를 취득한 아들러는 대학 시절에 사회주의 학생연합 Sozialistischen Studentenverein)의 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곳에서 1897년에 러시아에서 온 지적인 사회주의 운동가 레이샤 엡스타인(Raissa Epstein)을 만나 결혼을 하였고, 3명의 딸과 한 명의 아들을 두었다.

 

아들러는 1898년에 안과 의사로 첫 개업을 하였다. 안과 의사로 일하면서 눈이 나쁜 사람일수록 탐욕스러운 독서가가 되기를 원한다는 놀라운 사실에 주목했고, 모든 인간의 발전은 사람들이 무의식중에 자신의 열등성을 극복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발견하였다.

 

 

그 후 일반 내과에서 신경학과 정신의학으로 전환하였다. 아들러의 병원이 있던 곳은 비엔나의 하층민이 살던 곳으로, 주변에는 유원지와 서커스 공연장이 있었다.

아들러를 찾는 환자 중에는 당연히 서커스를 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들을 통해서 특수한 강점과 약점을 발견하면서 '기관 열등'이나 '보상'과 같은 개념에 대하여 통찰할 수 있었다.

 

1902년 가을, 프로이트는 아들러를 자신의 토론 그룹에 초대했고 후에 이 모임은 1910년 아들러가 의장이 된 비엔나 정신분석학회(Vienna Psychoana- lytic Society)로 발전하였다. 

초기에 프로이트와 아들러는 조화로운 관계였지만, 프로이트가 자신의 이론에 대한 엄격한 충성과 획일화를 요구한 것이 원인이 되어 아들러는 의장직을 맡은 1년 후인 1911년에 정신분석학회를 탈퇴하였다. 

인간의 기본 동기에 대해서 아들러는 권력에의 의지를 표명했는데, 이것이 프로이트의 쾌락원칙과 대립하여 나타난 결과였다. 프로이트와 결별한 뒤, 아들러는 평소 교류가 많았던 사회주의자를 중심으로 사회주의적이고 교육적인 이념을 강조하는 '학생 자유정신분석연구회(Society for Free Psychoanalytic Inquiry)'를 결성하였다. 

 

1912년에는 개인심리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이 기관을 개명하고서는 개인 심리학회(Society for Individual psychology)로 창설하였다.

아들러는 군의관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뒤, 이후 오스트리아 정부의 요청으로 신경증 학생과 그들 부모가 상담을 받을 수 있는 아동상담소를 설립하였다. 

 

 

이는 현재 지역사회 정신치료소의 선구자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때 아들러는 교사, 사회사업가, 의사, 그리고 다른 전문가들을 양성하는 현장실습 장소로 비엔나의 공립학교에 최초의 아동상담소를 설립하였다. 

그곳에서 부모교육, 부모상담 프로그램, 교사교육, 집단상담의 새로운 장을 개척하였다. 

 

당시 혁명적인 시도로 평가된 아들러의 아동상담소는 비엔나와 전 유럽에 걸쳐 빠르게 확산되었다. 아들러는 미국, 네덜란드, 프랑스, 스웨덴, 벨기에, 체코, 독일, 유고슬라비아, 영국, 스코틀랜드 등을 순회하면서 수없이 많은 강연을 하였고, 그 가운데 많은 추종자들을 만났다. 

1926년 미국에서의 첫 순회강연을 가진 이후로 아들러는 미국 방문이 잦아졌다.

 

유럽에 대한 나치의 압제가 시작되었던 1935년, 사회적으로 평등한 사회에 관한 급진적이고 정치적으로 수용될 수 없는 개념을 가졌던 아들러는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그 뒤 1937년 스코틀랜드 애버딘(Aberdeen)에서 애버딘대학교 초청으로 실시한 3주간의 순회강연 도중에 사망하였다.

아들러는 의사, 교사, 부모와 같은 많은 청중 앞에서 집단치료와 가족치료를 실시함으로써 내담자와 공식적으로 일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는 다른 전문가들이 상담 상호과정을 직접 관찰하여 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러한 모의실험 상황(demonstration)을 이용하였다. 아들러의 죽음 이후, 그의 연구에 관한 관심은 점점 퇴조되었고, 아들러의 제자들은 나치 정권과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유럽 대륙과 그 외 지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그들 중 상당수는 미국으로 건너갔고, 미국에서 그들은 프로이트 심리학의 대립으로 보이는 아들러의 사상에 대한 아주 심한 거부반응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개인심리학은 다시 르네상스를 맞이하였다. 

 

루스(V. Lous), 라트너(J. Rattner), 스펄버(M. Sperber), 특히 드라이 커스(R. Dreikurs)와 그의 많은 미국 동료와 학생들에 의해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은 재조명 받기 시작했고, 그 후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 

이처럼 아들러는 프로이트를 비롯한 비엔나 정신분석학회의 핵심 구성원 중 한 사람으로서 정신분석 운동을 일으킨 주요 인물이다. 

 

게다가 정신분석의 장을 떠나 심리치료 및 성격 이론에서 개인심리학이라는 새로운 학파를 창설한 최초의 인물로도 평가되고 있다. 아들러는 상담 및 심리치료 분야에서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인물로서, 후학에게 독보적인 영향을 미쳤다.

롤로 메이(Rollo May), 빅토르 프랑클(Viktor Frankl), 에이브러햄 매슬로(Abraham Maslow), 앨버트 엘리스(Albert Ellis) 등이 그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아들러의 저서는 진보적이면서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내용으로, 후에 카렌 호나이(Karen Horney), 해리 설리번(Harry Sullivan), 에리히 프롬(Erich Fromm)과 같은 신프로이트학파에도 깊은 통찰을 일으켰다. 

아들러는 다양한 양식의 정신 병리를 예방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사회적 관심과 민주적 가족구조에서의 자녀 양육을 강조하였다. 그의 개념 중 가장 중요한 열등감 콤플렉스는 자긍심의 문제와 인간 건강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아들러는 출생 순서에 따른 각 인물이 지니는 일반적인 특성에 대해서도 논하면서 맏이와 둘째, 막내나 외동 등의 특성이 성격에 미치는 영향을 밝히기도 하였다. 니체(Nietzsche)의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권력에의 의지는 니체의 그것과는 달리 좀 더 나은 변화를 위한 인간의 창조적인 힘에 초점을 둔 개념이다.

 

아들러는 전체성(holism)에 대한 주장을 펼치면서 인간은 나누어질 수 없는 전인적 존재라는 주장도 했는데, 이러한 그의 이론은 후에 인본주의 심리학에서 크게 조명되었다. 

또한 맥그로우힐(McGraw-Hill) 사의 『세계인물 백과사전』(1973)에서는 아들러를 가족치료와 지역정신의료를 최초로 실시한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은 세계 대전 당시 군의관으로서의 경험에 입각하여 자기중심적인 우월의 논리를 넘어서는 공동체감을 중시하면서, 인간을 하나하나의 요소로 분할할 수 없는 통합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개인의 독자성을 중시하는 시각을 가지고 있는 분야이다. 

또한 그는 남성과 여성 간의 힘의 역동이 인간 심리 이해에 결정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페미니즘적 입장에 선 최초의 심리학자이기도 하다.

 

개인심리학에서 말하는 심리치료나 심리교육은 내담자의 공동체의식을 개발하고, 사적인 견해를 계승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개인심리학의 영향은 현대까지 지대하게 퍼져 있는데, 자녀 양육, 결혼 및 가족치료, 학교상담, 인간관계 개선, 부모교육 및 부모상담 등 수많은 분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 개인심리학은 다양한 현대의 사고체계 및 심리치료 접근의 선구로 인식되고 있다. 알프레트 아들러는 현재 프로이트, 융과 나란히 인간의 무의식과 심리 역동에 대한 중요성을 역설하고, 심층심리학의 혁신적인 분야를 창설한 세 사람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

 

 

※ [ 알프레드 아들러 ] 는 무의식중에 자신의 열등성을 극복 하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인간은 나누어 질 수 없는 전인적 존재라는 주장을 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개인 심리학을 강조 하셨고 심층 심리학 창설한 분중 한분이라고도 합니다.

 

오늘날 여러 심리치료와 상담치료의 근본이 되셨던 분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흔히 우리가 말하는 심리치료, 상담치료는 자신 안좋은 상황을 극복하고 발전하려는 행동중의 하나 입니다.

 

요즘 아파서 병원을 가는 것보다 정신적 치료를 위해 병원을 가는 분들이 많아졌다고 하는데요

그만큼 어려운 시기이기도 하고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으시는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힘내시고 이겨내시고 화이팅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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